개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인의 이야기로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선 사회학에는 대규모 양적조사로 거대 구조와 역사를 분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에서 조사 대상이 되는 표본은 편차 를 가능한 한 제거한 '대표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 으면 모집단에 대해 추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손에 든 것은 사회의 대표도 전형도 아닌, 각자 개성적이고 다양하 고 복잡한, '우연히 만난 개인'의 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양적조사와는 다르면서도 사회 전체에 대해 이해하 기를 그만두고 단지 어떤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방법이 생 겨났습니다. 하지만 새로 생겨난 방법에는 그 나름의 문제가 있습 니다. 이 방법은 개인의 이야기에서 밖으로 나와 거대한 사회구조 나 역사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마치 개인의 생활사를
'소설'과 동등한 것으로 삼고 '감상할 것'을 요구하는 듯합니다. 나는 사회학에 이 두 가지 방법만 있다는 것이 젊은 시절부터
참을 수 없이 불만스러웠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에서 청취조사를 하 다 보면 이야기와 역사는 '동일한 것'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그때까 지의 사회학에서는 이 '이야기와 역사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불 가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개인의 이야기에서 사회 전체를 생각하 는 방법에 대한 저의 모색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인의 생활사를 사회와 역사 분석을 위한 단순한 자료로 여겨 버리면 그 풍부함과 재미, 인생의 아픔과 애달픔을 이해할 수 없습 니다. 하지만 생활사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실재와 떨어뜨 리고 소설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만 여기게 되면, 그 배후에 존재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특히 후자, 즉 개인의 이야기를 사회적, 역사적 실재와 떨어뜨 려 놓는 사고방식은 사실 '소수자' 연구에서 주로 쓰이는 방법입니 다. 사회에서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은 대규모 양적조사로 다담 기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에 대해 조사 하려면 대부분의 경우 대표성이 없는 질적 자료로부터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자가 거꾸로 움직이게 됩니다. 즉 소수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 사실성과 역사성을 보 지 않고 단지 그 이야기를 마치 문학인 양 맛보는 방법이 되어 버리 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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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술자는 그런 반 친구들을 단 한 번도 '불쌍하다'고 표현하지 않았다다른 구술 장소에서도 그녀는 그와 비슷한 표 현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코코아 에피소드는 소녀들이 생각한 대로 행하고 씩씩하게 현실을 바꾸어 간 것의 끝에 드러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잔혹 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지역의 여성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동한 결과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그리고 약자나 소수자, 혹은 '타자'라고 하는 존재는, 통상적이라면 짊 어지지 않아도 될 책임을 억지로 지게 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 다는 것을. 이 코코아 이야기는 보여준다.
소녀들은 불쌍한 피해자도 아니며, 자유롭고 씩씩한 저항의 투사도 아니다. 현실의 쓴맛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이 괴로움은 괴로움으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괴로운 경험과 그 표현은 생활의 실천적 문맥 안에서 경험되며 표현된다. 어떠 한 일이 생긴 밤, 따뜻한 목욕물과 코코아를 찾아서 친구 집에 온 한 여중생의 괴로움을. 우리가 직접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은 불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 그 리고 구술자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목욕물과 코코아를 제공했다 는 것. 그리고 그것을 25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청 취자인 나에게 말해 주었다는 것.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필자가 되어 이 이야기를 적어, 지금 이것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무언가
를 전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포함한 무엇인가 가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담배 이야기는 아무리 가혹한 상황이더라도 사람은 즐거움과 재미를 찾아낸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코코아 이야기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생활 안에도 '어린 여성이라는 것'의 괴로움 이 존재하며, 그것이 본인에 의해 언어로 표현되는 일은 매우 제 한적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어떤 행위나 상황에 대해, 그것 이 실제 어떠했는지에 대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복잡하 고 풍부하며 예상을 배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들을 끌어들이는 역사와 구조가 얼마나 잔인하고 냉혹한 것 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만약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생기는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럴 때에도 개인의 이야기를 세계로 부터 단절시킬 필요는 없으며 역사와 구조의 가혹함에 대해 평가 철하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 둘을 연결 짓는 매개 항인 '인간에 대한 이론'에 변화를 줌으로 해서 거시적인 역사와 구조의 가혹함, 그리고 미시적인 개인 행위의 창조성과 주체성을 모순 없이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적사회학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우리 들의 인생이란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 상황 속에서 행하는, 재현 불가능한 일회성의 행위와 선택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과 행위를 계속 관찰해서 기록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상황과 행위가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에 관한 이론'을 풍부 하게 해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 관한 이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 상황에 있다 면 그런 행위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이해', 또한 그런 상 황에서 한 그 행동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 는 '이해'의 집합이다. 이 이론은 폭주하여 상호 모순되는 다수 의 가설을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론은 더욱 가설을 늘리 려고 한다. 즉, 상호 모순되는 가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 른 모두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실물과 같은 크기의 지도 를 그리려는 듯, 모순되는 가설들을 최대한 늘리려 한다. 이 이론 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이 즐겁 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의 가혹함을 축소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이 해'이다.
주체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상황에 대 한 책임 전부를 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주체성과 행 위 책임을 일대일로 관계짓는 것을 그만두고, 상황 또는 역사와 구조가 가지는 '의미'를 사회적으로 토의해 나갈 수 있다. 거기에 는 책임이 발생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줄어들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인간에 관한 이론을 최대한 복잡하게 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의미란 없다. 우리가 어떤 전쟁에 휘말 려들게 되는 것에도, 어떤 계층의 집에 태어나는 것에도, 혹은 '남 자'나 '여자'인 것 그 어느 것에도 의미는 없다. 우리들은 절대적 인 외부에 연쇄하고 있는 무한한 인과관계의 흐름 안에 갑자기 던져졌고, 거기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인과의 연결고리 안에서 나누어 받은 손 안의 자원을 어떻게 해서든 사용해서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의미 란 바로 이 '필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우 리는 왜 우리가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 불가능한 세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필사적으로 매일을 살아 나 가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인간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이 작업에 끝이란 없다. 이 일은 무한히 계속된다. 사회학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각각 한 번씩만 주어지는 역사와 구조 안에 서 그 상황에 놓인 행위자들이 이 행위를 선택했다는 사례의 보 고를 무한히 반복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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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든 작든 어떤 조사라도 인간 을 상대로 하는 한 조사는 모두 똑같이 사회에 둘러싸인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소리'가 '자료'로 될 때까지. 그 사이에는 이런 거대한 해석과 상호 행위가 파묻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나만의 체험은 아닐 것 이다. 대부분을 '외주'하는 대규모의 조사에서도 연구자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는지 아닌지만 다를 뿐, 같은 요소가 그 과 정에도 들어 있다.
우리들이 처리하는 숫자도 원래는 누군가가 설문을 읽고, 거 기에 답하고, 어떤 선택지가 알맞은지 그때그때 선택한 것이다.
즉 해석과 재해석이라고 하는 질적인 과정이 양적조사의 기반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에 의해서 질적조 사도 양적조사도 타당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 객 관적인 자료, 그와 다른 쪽에 주관적 자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 돈 자료가 상호작용과 주관적 판단 안에서 그때그때 만들어진다 고 한다면, 우리들은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것을 가 지고 일을 해 나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더구나 그것으로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완전히 타당한 것은 되지 못하더라도 대략 타당한 것은 될 수 있다. 어떤 조사 방법이라도 블랙박스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때그때의 조사 결과에 만 그 객관성을 묻는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으며, 어떤 하나의 조사 방법이 통째로 의심스럽다고 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대략적인 타당성에 기초 한 조사는 개개의 분석에 착오가 있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바깥의 세계와 어떻게든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조사에 착오 가 있는 사례도 다수 있지만 대략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물론 그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료나 과정 의 투명성과 과학자 공동체의 토의 등 충족해야 할 기준들이 있 다. 여기에서 이것들 각각의 원칙에 대해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다만 양적조사든 질적조사든 사회학자 공동체(및 그것을 둘 러싼 바깥의 세계)에 대한 열린 토의 자체가 이 '대략적인 타당성 -이라는 원칙'에 따라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머튼에 의하면 이런 과학자들의 에토스, 관습mores, 혹은 '아비 투스' 그리고 이들에 기반한 상호작용과 해석이야말로 적인 타당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자동적'인 과정은 아니 겠지만 그래도 그런 것 이외에는 어떤 에도 기댈 수 없다는 것 을 우리가 몇 번이고 자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에토스나 아비투스를 가진 것은 과학자뿐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열린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토의가 가능한 한 보증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양적조사 안에 블랙박스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비관적으로 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양적조사는 질적조사와 같은 정도로 자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양적 조사는 질적조사와 같은 정도로 타당하다'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우리는 여지껏 상호 행위와 해석이라고 하는 '사회학적인' 과 정을 '사실'이라고 하는 것과 단절시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앞으 로는 상호 행위나 의미적 해석에 의하여 어떻게 '사실' 혹은 '세계' 에 도달이 가능한지를 성실히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사실과 타당성이라는 것을 이른바 사회에 위탁한다. 우리들은 사람들과 함께 타당성과 사실성을 그 장소에서 제작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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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데이빗슨의 개념상대주의 비판과 관용의 원칙
데이빗슨은 <개념틀이라는 생각에 대해>라는 논문 안에서 '개 념틀'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개념상대주의'를 비판 하고 있는데, 그는 개념상대주의 비판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구성하는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을 비판한다. 데이빗슨에 의하면 이 이분법은 콰인이 비판한 분석과 종합의 구별, 환원주 의라고 하는 '두 개의 도그마'에 이은 제3의 도그마이다.
데이빗슨의 논의는 대략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그는 우 선 개념틀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그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에 서는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한다. 따라서 개념상대주의를 다른 언 어와 언어의 문제, 즉 번역 불가능한 언어와 언어의 문제로 이해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번역의 실패'에 대해 데이빗슨은 그것을 전면적 실패와 부분적 실패, 이 두 가지로 구분한다. 전면적 번역 의 실패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활동'이 있고 이것이 언어라 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전면적으로 번역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것 을 타르스키의 규약 T를 참조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부분 적 번역의 실패 즉 번역이 가능한 대화 상대와의 부분적 오해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해석을 고쳐 수정하면 된다고 지적한다. 이 재 해석은 대화 상대가 대략적으로 올바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전제 에 기초한다. 그 전제를 데이빗슨은 '관용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개념상대주의 및 그 배경에 있는 '경험론의 제3도그마' 즉 조직화하는 것과 조직화되는 것의 분리라고 하는 개념은 정당화 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우선 데이빗슨은 개념틀' 그리고 '개념상대주의' 개념을 다음 과 같이 정의한다.
"개념틀이란 경험을 조직화하는 방법이며, 감각 데이터에 형식 을 부여하는 범주 체계인 동시에 개인이나 문화, 시대가 눈앞의 풍경을 탐구하기 위한 시점이다. 하나의 틀에서 다른 틀로 번역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한 인간을 특징짓는 신념, 욕망, 희 망, 약간의 지식은 다른 톨의 인간에게 진심으로 대응할 만한 것을 가지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실제는 구조에 상대적이며 하 나의 체계에서 실재로 보이는 것이 다른 체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데이빗슨 1991:192]
확실히 우리들은 곧잘 경험을 조직화하여 현실을 구축하는 들 혹은 언어 그 자체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틀 은 서로 비교도 할 수 없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이해하 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사회학에는 현실과 언어의 괴리를 전제하는 이론이 많은데 이 이론들은 '타자성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 사회학자가 사는 세계는 분단되어 있고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 져 있다. 세계는 서로 다른 가치관과 태도, 감정, 경험을 가진 작 은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그들은 서로 대등하지 않으며 강한 권 력과 권위, 혹은 경제력을 잡은 일부 집단과 그 외의 아무것도 가 지지 못한 다수로 구별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도 다시 성별이 무 엇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가졌는지, 피부색 은 무엇인지에 의해 세세하게 갈라진다. 우리들의 세계는 뒤섞 인 경계선들로 복잡하게 나뉜 세계이다. 이 세계는 '타자'로 가득 하고 또 '비합리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서로 수용되지 않는 다른 시점에서 보면 한 시점에 따른 합리성은 자주 비합리성이 되고는 한다. 베버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꽤 멀리까지 와 버린 듯 보인다.
따라서 사회학자는 세계를 나뉘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름 전제한 이론을 만들고는 한다. 우리는 '인간'보다는 '', '합리 성'보다는 '비합리성', '이해'보다는 '권력' 쪽에 매우 익숙하다. 그 런 사회학자의 눈에는 데이빗슨의 개념상대주의 비판이나 관용 의 원리는 위험할 정도로 긍정적인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차이, 권력, 갈등, 저항을 씻어 내고 행복한 타자 이해의 길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번역 불가능성은 하나의 메타포이며, 그것도 잘못이 해된 메타포이다 [데이빗슨 2010:207].
모든 언어는 실재를 변형시킨다는 의견이 있다. 이는 마음이 사 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언어가 없어야 가능하다 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언어란 (필연적으로 왜 곡하는) 비활성 개체로,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작용으로부터 독 립한 개체이다. 하지만 나는 이 언어관을 지지하기 어렵다 [데이빗 슨 1991:194].
•만약 마음이 왜곡 없이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음 그 자체가 범주 혹은 개념을 결여한 상태여야 한다. 이런 특성 없는 자아는 철학의 세계와는 완전히 부분의 몇 가지 이론과 가깝 다. 예를 들어 주체의 모든 욕구, 습관, 경향성으로부터 떨어진 결 단에 자유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 있다. 혹은 마음 스스로가 지각할 수 있고 관념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하는 여러 이론도 존재한다. 이이론 모두는 마음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여러 특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어떤 종류의 논법에서는 필연적 결론이지 만 우리는 이 결론 그리고 그 전제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같은 책 194-195].
언어를 실재나 경험과 분리하는 사고는 '특성 없는 자아', '여 러 특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마음, 혹은 구축되어 있지 않은 자 아와 사회를 전제하고 있고, 데이빗슨은 이런 언어 이전의 존재 를 부정한다.
그나저나 개념상대주의의 문제를 언어라는 것으로 두 사람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번역할 수 없을 때, 그런 언어가 원래 부터 가능한지 혹은 그것이 언어인지 아닌지 따져 보는 문제라고 해 보자. 데이빗슨은 두 개의 언어를 번역하는 데 실패한 경우를 '전면적 번역 실패'와 '부분적 번역 실패' 이렇게 둘로 나누어 논 의를 진행한다.
먼저 데이빗슨은 어떤 언어를 번역하는 데 전면적으로 실패 한다면 그것이 언어라는 것을 부정한다.
어떤 활동 형태가 우리들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그 활동 형태가 발화 행동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맞다면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들의 언어로, 언어를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활동 형태는 발화 행동이 아니라고 말이다 [195].
데이빗슨은 개념틀의 작용을 우주, 세계, 자연이라는 실재, 그 리고 감각 자극이나 감각으로부터 얻은 자료, 혹은 '환경'이라고 하는 경험을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203-204]. 특히 이때 경험이나 실재와 '들어맞는' 틀이 존재할 경우, 데이빗슨은 극단 적으로 그 틀을 '참'이라고 서술한다. 결국 개념상대주의의 문제 는 '참임에도 불구하고 번역할 수 없는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감각 증거 전체에 이론이 들어맞는다는 것은 그 이론이 참이라는 것과 같다. 이론이 물리적 대상, 숫자 내지 집합에 양화 되어 있 고 그 이론이 전체 감각 증거와 들어맞는다면 이런 존재자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은 참이다 [206].
그렇다면 어떤 존재자와 들어맞는 사고로 언어나 개념틀을 특징 짓는 시도는 결국 참인 것이 수용 가능한 개념틀 내지 이론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도달한다. 하나의 틀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세 부적으로 다른 견해들을 용인하려면 대개 참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 자신의 것과 다른 개념들이라는 것은 대개 참이지만 번역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것이 유효한 기준인지 아닌지의 물음은 언어에 적용된 진리 개념을 번역 가능성 개념으 로부터 독립시키면 우리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물 음과도 같다. 내 생각에 대답은 이렇다. 번역 가능성 개념으로부터 독립된 진리 개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207].
2023년 3월 1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