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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지기·문장 발효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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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내 안에 자유의지와 의식적인 고의적 선택을 행하 는 나가 없다고 진지하게 믿는다면, 어떻게 무엇을 할지를 결 정할 수 있을까? 답은 밈meme이라는 시청자를 믿는 것이다. 유 전자와 밈의 선택이 행위를 결정할 것이고, 부가적인 '나'가 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직하게 살고 자 한다면, 나는 그냥 비켜서서 결정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 록 놔둬야 한다.

나는 결과가 불안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어떤 행 행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관찰하는 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나는 큰길과 더 예쁘지만 칩까지 더 오래 걸리는 길 두 개의 가능한 귀가 루트를 가지고 있었다. 차를 몰고 분기점 으로 올라가면 우유부단함에 자주 좌절한다. 내가 어떻게 결 정할 수 있을까? 어느 것이 가장 만족스러울까? 어느 것이 가 장좋을까? 어느 날 문득 '나가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 달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의를 기울였다. 신호등이 바뀌자 발은 메달을 받고, 손은 기어를 바꿨다. 그러자 선택이 행해졌 다확실히 나는 돌벽이나 다른 차에 들이박은 적은 없다. 그리 고 어느 길로 가든지 괜찮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많은 결정들이 이런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결정을 그냥 그러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엄청난 해방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뉴로패스는 우리에게 그런 쉬운 탈출 구멍을 제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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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이 책임감을 가진 자아성의 환상 없이 존재하는 상태를 실제로 성취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닐은 수행적 모순의 수 수께끼를 체화한다. "결국, 여전히 뭔가를 경험해." 닐은 말한다. “단지 극단적으로 다른 경험, 우리 영혼에 대한 단편적인 진실 에 훨씬 더 민감한 경험을 할 뿐이지, 의지, 목적, 자아성, 옳고 그름이 없는 경험이야." 언뜻 보기에 닐은 "가려진 것을 넘어갔어… 의식의 환상을 통해 자신의 길을 보았다고 생각하는거 야." 그런 상태에서 닐은 더는 "동기, 목표, 이유"라는 관점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닐 스스로 묘사한 대로 다음과 같다. "일정한 수행-억제 회로를 차단했지 … 심리학자, 당신들이 말 하는 불안, 공포, 그런 헛소리들을 말이야. 그런 헛소리는 이제 나에겐 추억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좀 더 기만적인 회로 도 차단했지. 예를 들어, 나는 아무것도 의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난 '내'가 뭔가를 한다는 생각에 더는 속아 넘어가지 않아"

우리는 이 상태를 브라시에가 과학적인 방법에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합리적인 "자아성의 궁핍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것이 "개념이 지배하는 이성의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그것을 의식 연구자 수전 블 랙모어가 기술하는 일종의 선의 무아로 간주할 수 있을지 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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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이 어떻 게 '서사의 범주가... 현대과학에 의해 인지적으로 불필요한 것 "으로 만들어졌는지"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이유와 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유와 설명의 불 가피한 실패에 관한 것일 때 더욱더 그렇다. 그리고 유사하게, •과학소설이나 추리소설 같은 장르적인 관습을 넘어설 방법은 없다. 특히 우리가 그런 장르를 비판하거나 약화하려고 할 때 더욱더 그렇다.

이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소설은 수행적 모순을 탐구하면서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자 안 간힘을 쓴다. 즉, 소설은 그 안에서 표현되거나 극적으로 보여줄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지점이란 바로 닐 자 신의 의식이다. 네이글의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무의미해 지는 방식으로 실제로 세계를 살고 경험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 가? 토머스가 꼭두각시 기계에 묶여 있을 때도 "토머스는 대체 로 경이로워했고, 심지어 어떤 숭배감을 느끼기도 했다. 충동과 구별할 수 없는 계획을 가지고 사고 없는 세계라는 난파선에서 또 하나의 사건을 일으키며 자아도 양심도 없이 나아간다는 것 은 어떠한 것일까? 인간처럼 보잘것없고 망가진 것이 아니라, 자 아 없는 운송 수단, 앞에 온 모든 것의 전달자로서 행위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소설은 이 물음에 마주할 것을 강요하지 만, 동시에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을 금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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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항상 좌절된다.

이런 교묘한 공작을 반복하면서 뉴로패스」는 일종의 반 anti추리소설이 된다. 추리 장르는 일련의 특수한 가설이나 설 명을 통해 움직이면서 작용하는데, 각각의 가설 및 설명은 처 음에 제안되고 나서 이후에 신빙성을 잃는다. 각 가설의 실패는 더 나은 가설로 대체될 여지를 남기며, 이는 소설 마지막에 사 건이 해결될 때까지 계속된다. 셜록 홈스가 말했듯이, "불가능 한 것들을 제거한 뒤 남는 것이 아무리 어처구니없을지라도 그것 이 진실이다. 그런데 '뉴로패스는 이 과정을 악질적인 무한성 으로 끌고 간다. 소설은 결코 결정적인 설명에 도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해 설명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는 바로 그 경향을 약화한다. 우리는 끝까지 무엇이 닐의 행위 에 동기를 부여하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닐이 토머스를 박해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그가 토머스를 계몽하 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 논증A를 통 해 우리가 얻은 교훈 자체가, 그런 문제가 절대 심리적인 동기부 여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같은 건 없다." 소설은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한다. "원 인만이 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닐이 토머스에게 상기시키 듯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이유라는 것은 사기 일 수 있지... 그렇지만 여전히 기능하고 있어." 다른 말로 하자면 '뉴로패스는 서사를 완전히 제거하기보다는 서사적 예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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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우리는 어떠한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게임”을 통해서 논증A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증A가 인정 - 인정이라 는 단어가 여전히 적절한 단어라면 - 되는 것은 날이 오직 논증A 를 실천으로 옮기며 확립했을 때, 닐이 직서적으로 논증A를 받 아들이지 못하는 토머스에게 논증A를 폭력적으로 강요했을 때 이기 때문이다. 브라시에는 우리가 합리적인 과학적 주장에 의 해 "구속“될 때, "이 구속은 객체에 의해 수동적으로 제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행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뉴로패스는 그러한 자발성의 여지가 없는 과정 을 서술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브라시에가 바라는 것 처럼) 서사를 없앨 수 없다. 오직 서사를 통해서만 의미를 확립 하고 안정시키려는 서사 자신의 허상을 풀어버리는 지점에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적 모순을 철학적으로 극복하거나 환원시키기보다는 우리의 수행적 모순을 포용할 필요가 있다. 적절하게 상황화된 수행적 모순은 핵심적이며, 심지어 피할 수 없거니와 오히려 필 요하다. 이것을 일종의 확장적 또는 역설적 실용주의라고 부르 겠다. 관념의 함의와 귀결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행 화하는 것이다(그리고 그곳이 윌리엄 제임스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관념이 자신의 "진리"를 발견하는 장소이다). 관념이 우리 의 인지력 자체를 포함하는 현재 상황 속에서, 관념은 우리 자 신에게 일종의 실험을 할 것을 요구하며, 그 결과로 우리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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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적인 처리과정에 완전히 맹목적이야... 의식의 신경 상관 항은 그 심층에 있는 진짜 신경생리학적 실권자에게는 접근하 지 못해.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 속의 신 화적 죄수들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동 굴 속 죄수들에게는 적어도 자신의 곤경을 깨닫고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박한 희망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는 우리의 경험이 환상임을 알아차리게 되더라도 결코 우리의 환상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가려진 틀 뒤에 놓인 그림자“를 볼 수 없다. 즉, 나의 알아차림을 제한하는 "틀" 자체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내 경험이 사실에 있어서 제한되 어 있고 부분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내 경험의 경계를 지각할 수 없기에 내 경험이 포괄적이기는커녕 제한되어 있다는 것조차 포착할 수 없다. 이것이 예를 들어, 소설이 나의 "시야”가 "가시적인 가장자리를 거치지 않고 그저 '빠져나가는' 것" 같다 고 관찰하는 이유이다.

또한, 논증A는 우리 자신의 내적 감각, 또는 철학자들이 감 각질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우리의 공통적 직관을 약화한 다. 나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내적 삶에 어떤 생생함과 강도 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경험의 이런 질적인 차 원은 내가 포착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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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다.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더라도 대체로는 알아차림(의식, 주목, 감 각 지각 등)의 인간적 양태 외부에서 지배적으로 작동하는 미 디어 기술의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의 복잡한 얽힘은 현재의 인간 경험에 근본적인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뉴로패스 속 논증A는 이것이 컴퓨터화된 마이크로센서와 한 센이 "21세기 미디어"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형태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뇌와 뇌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뇌는 단순히 스스로를 추적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지 않다고・・・ 뇌에는 처리 능력이 부족해...기 껏해야 뇌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관한 만화를 그리는 것이 지" 논증A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삶이 그러한 "만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디즈니 월드“에 사 는 것이다. "허영을 편안한 허영으로 가리며 ・・・ 물리적 사실보다 는 심리적 욕구에 정착한 ” 세계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서 불가피하다.

뇌의 처리과정 대부분은 경험할 수 있는 것 밖에 있어. 그것은 단지 의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는 의식에 부재한 것으로서도 존재하지 않아... 우리의 뇌는 ・・・ 뇌를 이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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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 사건까지 추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리적인 자기 설명은 허구적 서사, 혹은 작화증confabulation 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여기서 벤저민 리벳 의 "의사결정의 선도자"에 대한 유명한 실험들을 떠올릴지도 모 른다. 이 실험들은 정동이론과 심리철학 양쪽에서 단골 소재 이다. 그리고 '뉴로패스‘의 한 지점에서도 명시적으로 언급된 다. 리벳은 피실험자의 상정된 행위에 대한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s가 피실험자가 그 행위를 수행하기로 의식적으로 결정 하기 0.5초 전에 뇌 속 뉴런에서 확립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 실상, 우리의 결정은 이미 우리를 위해, 혹은 적어도 우리 내부의 비의식적인 과정에 의해, 그런 결정을 내리는 우리의 알아차림 에 앞서서 내려졌다. 여기서 삼인칭이 일인칭을 한 수 앞선다. 일 인칭적 내관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정신적 사건이 그것을 객관화하는 과학적인 도구를 통해 측정되고 기록될 수 있다. 그런 조건 아래에서,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있다는 나의 감각 은 내 뇌 속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그 원인 을 부여하려는 자가당착적인 시도일 뿐이다. 소설의 말을 빌리 자면, "의지라는 것은... 일종의 부가물이며, 사후에야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일 뿐이야." "어떻게 사후에 의식적인 경험이 있는지“ 를 완전히 포착하기는 어렵다.

이 시간적 지연이 결정적이다. 이는 우리의 정신이 결코 정신 자신을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미디어 이론가 마크 한센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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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는 신경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역사학적이다. 브라시에는 인간의 주체성이 과학의 가차 없는 탈신비화와 세계의 탈주술 화로부터 슬쩍 빠질 수 있는 도피처를 더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사실, ‘뉴로패스’ 속 논증A는 사태가 더 극단적이라고 말한 다. 근래의 신경생물학과 인지심리학 연구는 우리 뇌에서 일어 •나고 있는 신경 처리과정의 대부분에 우리가 전혀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자각 이 너무도 오도되고 불완전하며, 환상과 오류를 일으키기 쉬운 이유이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상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어 더 철저하게 그러하다. 내관을 통해 자기진단을 해보려는 시도는 최선에 있어 무능하고, 최악의 경우 망상적이다. 우리가 우리 자 신에 관해 생각하는 대부분은 편향적이고 부정확하다. ‘뉴로패 스’ 속 논증A는 이 최근 연구의 부정적인 결과를 가능한 한가 장 도발적인 귀결로까지 밀고 나가면서, 단순히 사실에 있어서 가 아니라 원리에 있어서,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시사한다. 의도, 의미, 목적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신 경 처리과정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짜처럼 보일 뿐이 다. 그런데 우리가 필연적으로 의미나 목적 같은 인공물에 충실 하고 있는 한, 우리의 사고와 행위의 실제 물질적 원인은 우리에 게는 불가피하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우리는 구조적으 로 우리 자신의 정신 상태를 좇아 그것을 산출하는 뇌의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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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대신 폭풍우를 추적하기 위해 기상위성을 사용한다.

「뉴로패스」 속 논중A의 양상은 현대철학에서의 자연주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진다.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 레이 브라시에 는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양쪽을 인용하며 비슷한 요지를 전개 한다. 브라시에에 따르면, 과거 몇 세기 동안 물리학의 성공으로 인해 세계의 "이해 가능성은

의미의 문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근대과학과 함께, 개념적 합 리성은 신학과 신학적으로 변질한 형이상학에 계속해서 만연 하는 서사적 구조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다. 세계라는 책 의 저자는 없고 실재의 구조에 도사린 암호적 이야기는 없다. 자연은 어떤 이야기도 펼치지 않는다.

그런 관찰은 이제 더는 논쟁의 소재조차 되지 않는다. 세계의 탈주술화에 관한 막스 베버의 테제는 우리의 명백한 조건이 되 었다. 뉴로패스에 기술된 "당대의 문화는 "자연적 사건의 무 의미함,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것에 무심하다는 사실을 오래전부 터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우리가 과학적 방법을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에 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특히 우리의 정신에 적용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질문은 우리가 지금도 동요하 고 있는 질문이다. 논증A가 주장하듯 만약 자연주의가 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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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40대 심리학 교수 토머스 바이블의 이야기를 들려준 다. 토머스는 인간 정신에 관한 혁명적인 새 이론을 제시하는 ‘캄캄한 뇌를 가로질러서 ’라는 책의 저자다. 이 책은 너무 극단 적이어서 대중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평가는 혹독했 다. 책은 곧 절판되었다." 그러나 소설의 모든 것은 책 전반에 걸 쳐 "논증A"라고 언급되는 토머스의 이론에 주목한다. '뉴로패 스』가 과학소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소설이 단지 근미래를 설 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점은 캄캄한 뇌를 가로질 러서』의 저자 설명에서 언급하듯, 책이 제시하는 논증A가 "신경 과학, 심리학, 그리고 인지과학의 실제 추세와 발견"으로부터 외 삽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와 발견은 모두 "우리는 우리가 생 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라는 불편한 진리를 가리킨다.

논증A는 과학이 항상 "질과 의도 대신 양과 기능이라는 측 면에서 “ 사물을 이해한다는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과학 이 세계의 의도나 목적과 맞닥뜨릴 때마다 과학은 그것을 없애 버린다. 과학이 기술하는 세계는 자의적이고 무작위한 것이다. 모든 것에는 셀 수 없이 무수한 원인cause이 있지만, 어떤 것에도 이유reason는 없다." 물리학은 전쟁 기계, 대량 살상 무기였다. 지 난 몇 세기 동안 물리학의 거침없는 진보의 결과로서, "과학은 자연계로부터 심리학을 거의 문질러 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자 연적 사건이 징조를 담고 있다고,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믿지 않 는다. 우리는 다가오는 폭풍우에 대해 천둥의 신 토르를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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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의도, 욕망, 목적, 희망 등의 용어를 통해 이해하지? 그러 나 ‘뉴로패스」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사실 다음과 같다. "모든 생각, 모든 경험, 의식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다양한 신 경처리과정의 산물일 뿐이야." 당신은 당신이 어떤 것을 하기로 활동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을 볼 때-안타깝게도 '사변'Speculation이 아닌 '사실'Fact을 볼 때 -뇌는 단순히 일련의 감각적 입력을 처리했을 뿐이지... 그러고는 특 수한 행동적 출력을 생성시킨 것일 뿐이야." 뇌는 "결과로 초래 된 환경의 피드백이 쾌락이나 통증 체계를 어떻게 자극하느냐 에 따라 반복되거나 반복되지 않는 행동을 생성시키는 기계이 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유롭고 합리적인 존재자로 상상하기 를 좋아한다. 하지만 실제로 (소설에서 가장 가혹하게 냉소적인 구간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도덕적이고 의미 있는 세상 에 살고 있다고 믿도록 현혹된, 살점으로 이루어진 꼭두각시일 뿐이야"

브라시에는 이와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니체가 19세기에 시 사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아가 실존주의자들이 20세기 중반에 유지했던 입장처럼, 오늘날 "자연 자체에는 부재한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라는 주장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이는 우리 자신의 주체성에 특별한 지위를 더는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에 의해 생성되는 의미 자체는 무목적적이면서 완벽하게 이해 가능한 과정의 산물로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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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우주 속 다른 모든 존재자에게 참으로 여겨지는 것은 인간 존재자에게도 참이어야 한다. 우리가 세계에 관해 이해하게 된 것들은 우리 자신의 이해 과정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 제로 최근의 신경과학과 인지심리학의 발전은 우리의 뇌에 관 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는 대체로 뇌의 활동을 실시간 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1992년 처음 개발된 '기능적 자기 공명영상(이하 fMRI)과 뇌의 특정 부위에 영향을 줘서 사람의 느낌, 태도, 판단을 바꿀 수 있게 해주는 1985년 처음 성공적으 로 사용된 '경두개 자기자극법'(이하 TMS) 같은 신기술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들과 계산 능력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지난 30여 년 동안 뇌의 물리적 기능에 관해서 이전까지 인류 역사 에서 이룩했던 것보다 틀림없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뇌와 정신의 관계, 또는 뉴런의 전기화학적 과정과 전한 주체적 경험의 관계는 여전히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러나 ‘뉴로패스 ’속 논증A는 과학이 이전에 자연계에서 심리 학을 추방했던 것처럼 이제 인간세계에서 심리학을 추방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즉, 좀 역 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프시케psyche 자체가 급속히 탈 심리학화 depsychogize되고 있다. 심지어 주체성을 탈중심화하고 자 했던 정신분석학과 해체주의도 이런 만일의 사태에 우리를 진정으로 준비시키지는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 한 이유가 있으리라 의심 없이 믿는다. "인간 존재자는 자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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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히 가상 세계 설계와 인공지능의 실제 진보로부터 외삽하는 것이 아니다. 창은 또한 인터넷의 사회학, 그리고 오늘날 소프트 웨어 스타트업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조건들 로부터 외삽한다. 소설 제목의 일부를 차지하는 "생애 주기“는 디지언트 자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생애 주기"라는 말은 디지언트를 기획하고 개발하며 판매하려 하는 기업에도 해당 한다. 아주 현실적으로 여기서 "생애 주기"lifecycle는 상업적인 제 품주기 product cycle를 의미한다. 디지언트가 감수성을 가지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디지언트 또한 다른 소프트웨어처럼 진부화 의 위협을 받는다. 소설의 중간도 채 지나지 않아 블루감마는 폐업한다. 디지언트의 "고객층”은 "열성 디지언트 소유주들로 구 성된 소규모 커뮤니티로 안정화되었으며, 그것만으로는 블루감 마를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수익을 창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는,

디지언트를 계속 실행하고 싶어 하는 고객들을 위해 무료 버전 의 사료 생산 소프트웨어를 배포하기로 했지만, 그 뒤로는 고 객들이 모든 것을 재량껏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자신의 디지언트를 "정지“시키 고, 고통 없이 그들의 현존을 종식시킨다. 디지언트는 애초에 실 제로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안락사가 가질 수 있는 어









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사실, 디지언트는 결코 "성숙에 도달하 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발달상의 정체기라는 생물학적 모델에 기반한 발상은 반드시 적용될 필요가 없다. 디지언트가 계속해서 실행 상태에 있는 한, 디지언트의 인격 또한 계속해서 같은 속도로 진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디지언트가 자신 을 돌보는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자신의) 미래에 관 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지에 관한 질문 은 열린 채로 남겨둔다. 심지어 소설이 끝날 무렵, 사람들이 "이 디지언트들을 키우는 데 몇 년을 바쳤다"고 해도, 디지언트들은 완전히 성숙한 어른들보다는 여전히 ‘십 대’인간에 가깝다.

디지언트의 지능은 유기적 존재자의 지능과 어떤 근본적인 의미에서도 다르지 않다. 창은 이러한 설정을 유지하며 감수성 의 문제를 생명의 문제로부터 조심스럽게 분리한다. 디지언트는 전자는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정확히 우리 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디지언트는 느끼고 감각할 수 있 으며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감각했는지를 반성할 수 있다. 그러 나 디지언트는 살아있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을 복제하거나 번 식하지 않는다. 호르몬의 부재로 인해 디지언트는 중성적이다. 심지어 디지언트가 "생존본능”이나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같은 것을 가졌는지, 아니면 자기보존을 향한 어떤 부류의 충동을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 123



력은 필연적으로 제한된다. 인지력은 단순히 자신을 둘러싼 세 계를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능은 세계 속에서, 그리고 세계 의 다른 존재자들과 협력하며 내재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법 을 찾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브뤼노 라투르의 표현법을 따르자면 지능은 다른 지능과 협조하고 동맹을 맺어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지 능이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도의 문제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 속 인간 등장인물은 뉴로블래스트 디지언트보다 뛰어난 유연성과 자발성을 가지고 있다. 그 래도 디지언트는 오늘날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디지털 행위자 보다도 월등한 유연성과 자발성을 과시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디지털 행위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비계산적인 구식 기계보다 더 유연하고 자발적이다.

AI에 관한 창의 설명은 로봇 기술자 중에서 로드니 브룩스 가 선호하는 지능에 관한 상향식의 체화된, 경험 기반의 행동 적 접근법에서 멀지 않다. 초기 컴퓨터 과학에서 지능은 보통 표상과 상징을 조작하는 능력과 그것으로부터 적절한 추론을 끌어내는 능력으로 정의되었다. 그렇게 AI 체계는 하향식 형식 으로 조직되었으며, 명제적 논리와 대규모 데이터의 고속 처리 를 강조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 이러한 접근은 난관 에 봉착하게 된다. 연구자들은 그 대신 생물학적 뇌가 실제로 발달하는 방식에 다소 가까운 연결주의와 학습 기반 전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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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휴리스틱은 매우 유연하다. 이는 휴리스틱이 하나의 경 험 분야에서 다른 경험 분야로 간단히 이전될 수 있음을 뜻한 다. 그리고 이 이전 가능성 자체가 일반적 지능 같은 것이 실제 로 존재한다는 최선의 징조다. 물론 휴리스틱의 적용 가능성의 범위가 넓다는 것은 휴리스틱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부적절 한 맥락에 적용했을 때, 우리를 오도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 하기도 한다. 스콧 베커의 극도로 환원주의적인 맹목적인 두뇌 이론(4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인데)은 우리 자신의 정신적 에 관한 우리의 직관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정확히 "인 지가 항상 휴리스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통찰력을 근 거지을 수 있는 믿을만한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 존재자는 너무도 많은 철학자와 이론가가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고 말했을 때의 합리적인 존재에 조금도 가깝 지 않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지능적인 존재자들이 우리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에서 지능은 휴리 스틱이다. 이는 동시에 그 지능이 언제나 유한하고 상황이며, 또 체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지능을 특별한 인지 기술의 하나보다는 전반적 감각력의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소설 에서 정신은 어떤 특정한 물리적·물질적 맥락 안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그러한 맥락의 본질적인 것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정 신이 가상적이든 생물학적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러하다. 인지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 119






자! 내가 전반적 감각력이라 부르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루이스가 경험을 특수한 성향으로 환원시키듯 이, 다수의 철학자와 인지과학자도 일반적이고 다목적적인 지 능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스티븐 핑 커는 인간의 정신이 다수의 “계산 모듈”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각의 모듈은 하나의 특정한 인지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고 주 장한다. 이 그림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 이 다수의 이유에서 의심스럽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모듈형 정신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제리 포더조차도, 이 이론은 정 신이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모듈을 불러들일지 결정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둘째로, 각기 특수 한 알고리즘을 운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듈"이라는 개념 은 사고가 실제로 작용하는 난잡한 방식을, 그리고 정신적 능 력이 점진적으로 발달한다는 점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형식적 이고 너무 직선적이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 다"는 원리를 고려해 볼 때, 모듈 이론보다 지능적 행동의 유연 성과 자발성, 창의성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 다. 셋째로, DNA에 내장된 정신 모듈이라는 개념은 사실적인 물리적 구체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물리적 뇌의 특수한 영역들과 특수한 기능들 사이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신-골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듈 이론은 널리 분산된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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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비록 복사본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배포할 수 있다 하더 라도, 그 과정으로 태어난 각각의 디지언트는 각자의 삶을 살 것이다. 각각의 디지언트는 과거에 보았던 세계를 새로운 눈으 로 바라보았고, 희망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희망이 꺾여 좌절해 보았을 것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또 거짓말 을 듣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소설 속 디지언트가 이런 방식으로 생성되어 이 방식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디지언트는 어떤 특수한 기술이나 성향, 지식 조 각의 묶음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전반적 감각력overall sensibility, 즉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져야만 한다. 소설은 결코 디지언트의 관점에서 사물 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애나와 데릭, 그리고 디지언트와 조 우하는 다른 인간 존재자의 관점에서 볼 때 디지언트가 의도, 목표, 선호, 그리고 동기를 가졌음은 분명해 보인다. 디지언트 는 상당한 정도의 자각을 보인다. 또한, 디지언트를 돌보는 인간 은 다른 인간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와 같은 수준에 서-최소한 어린아이와 대화하듯이 - 대화할 수 있다. 디지언트 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디지언트가 풍부한 내적 삶을 가진다는 것을 함의한다. 소설은 만약 어떤 존재자가 감각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 존재자를 실제로 감각적인 존재자로 받아들여 야 한다는 너그러운 원칙을 채택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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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용법을 사용하자면) 일반적 가능태를 실재적 가능 태와 혼동하고 있다. 논리적 가능성이나 일반적인 가능태는 논 리적 모순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 잠재성과 실재적 가능태는 이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여기서 저기로 가는 분명한 방식이 있음을 뜻하며, 그 둘 사이에 동선이나 “역 사적 경로"(화이트헤드)가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잠재성이나 실재적 가능태는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과 달리 현재 속에 실제 로 존재한다. 들뢰즈가 말하듯 가능태는 "현실적임이 없이 실재 적이며" 화이트헤드가 말하듯 "미래는 현실적임이 없이 단순히 실재적이다."

사변적 외삽- 혹은 일반적 가능태보다는 실재적 가능태에 관 한 탐구-은 실제 과학적 연구와 과학소설 양쪽의 핵심적 기반 이다. 메이야수는 말한다. "모든 과학소설은 암묵적으로 다음의 공리를 유지한다: 예측된 미래에서는 여전히 세계를 과학적 지 식에 종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인과율의 흐름이 여전히 지배 적이다. 그리고 과학소설적 외삽 또한 이런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메이야수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을 분석하 며 보여주듯이, 창의 소설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외삽적 사변의 제약을 극복하는 것은 과학소설 자체에 관 여하는 것이 아니라, 메이야수가 과학 밖 소설이라고 부르는 거 의 존재하지 않는 장르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된다. 메이야수는 후자의 장르가 “그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기하기에 충분하지만,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 111




그 경험을 추론할 수 있게 해주는지만을 고려하고 있다. 경험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직 어떻게 그것이 인지되거나 설명되는지만이 문제가 되고 있다. 만약 모더니즘 시인 T. S. 엘 리엇이 “경험은 했지만, 그 의미를 놓쳤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면, 이 모든 철학자는 정반대의 문제에 시달린다. 이 철학자들 은 모든 의미를 알아냈지만, 왜인지 실제 경험을 놓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철학자들이 현상적 경험의 가치와 의의,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성" 그것이 드러내는 "성향" 심지어 그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까지 놓고 말다툼을 벌 일 때, 그들은 이 경험을 인지적인 용어 이외의 용어로 고려하 지 못하고 있다. 경험에는 철학적인 설명이 놓친 차원이 있다. 그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차원이 철학을 통해 개념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놓쳐버린 경험의 차원이 미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미학은 인지적 철학의 타자이다. 제3비판에서 칸트 자신이 말하듯이, 미적 경 험은 "인지[인식]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에 근거하지 않으며 개념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미적 경험에 관한 칸트의 설명은 제1비판에서 행한 칸트의 유명한 주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그러나 이 모순은 그 자체로 지성의 기능과 상상력의 기능 사이의 차이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철학적 개념과 칸트가 미적 이념이라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51







해 더욱 직설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정당하게 "어떠한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는지를, 즉 양식styte의 문제를 포함한다. 우리가 실제로 감각질을 경 험한다는 점과 물리주의가 의심의 여지 없이 참이라는 조건에 서, 우리는 어떻게 감각질을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좀더광 범위하게 말하자면, 심리철학에서 경험의 자리는 어디인가?

메리의 이야기에 대한 대부분의 철학적 주석자는 이 질문 을 회피한다. 사실 그들은 현상적 경험이라는 관념 자체를 깎아 내리거나, 혹은 공허한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루 이스의 설명대로라면 메리는 어떤 것도 참으로 경험한 것이 아니 다. 메리가 빨간 부분이나 빨간 객체를 봄으로써 얻는 것은 그 것과 다시 조우했을 때 빨간색을 재인지할 수 있는 노하우, 혹 은 능력뿐이다. 감각 자체가 기묘하게도 공허한 것이 된다. 그것 은 자신을 넘어서는 미래의 사례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현재 순 간에 "일어나지 “ 않는다. 감각은 '그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 다른 사상가들은 이런 방향으로 좀 더 멀리 나아간다. 데닛은 다음 과 같은 일반적 논증을 펼친다. 비록 “현상학은 있는 것처럼 보이지 만이 부정할 수 없고 보편적으로 입증된 사실로부터 정말로 현상학이 있다는 귀결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스 콧 베커는 자신이 고안한 '맹목적인 두뇌 이론‘을 기반으로 - 메리 이야기에 관한 주석에서 - 다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여러 처리 과정을 통제할 수 없는 뇌의 불가피한 맹목성은 그 필수적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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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는 점을 모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잭슨은 감각질이 반드시 물리적 원인을 가져야 한다는 점과 감 각질 자체는 어떤 물리적 혹은 인과적 효과성도 결여하고 있어 잭슨이 스스로 꺼내놓고 잊어버린 듯한 점은, 질적인 경험이 체화되었다는 중요한 주장이다. 잭슨은 이 점을 오직 스쳐 지나 가는 관찰인 것처럼 진술한다. 내가 이미 인용했던 구절에서 잭슨은 "특히 신체적 감각의 일정한 특징들"로 식별될 수 있는 감 각질을 언급한다. 잭슨이 제시하는 예로는 "고통의 고통스러움“과 ”가려움의 근질거림“이 있다. 그런데 이를 좀 더 멀리까지 일 반화시킬 수 있다. 감각질은 단순히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 사 건이 아니다. 감각질은 신체의 물리적 활동과 그것이 세계 속여 타의 것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감각질은 우리 의 신체적 작용에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화이트헤드가 우리에 게 상기시켜주기를 좋아하듯이) "우리는 눈을 가지고with 보고, 혀를 가지고 맛을 보며, 손을 가지고 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눈이 본 것을 보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감정에 관해 말하는 것 또한 감각질일 수 있다. 그것은 신체적 상태의 결과이거나 상관 항이다.

이에 덧붙여서 나는 감각질 경험이 신체의 부재로부터는 발 생하지 않으며, 발생할 수도 없다고 말하겠다. 오늘날 거의 누구 도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환지통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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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틀어 특별한 전환점은 없다. 인공지능이 어떤 문턱을 지나 처 음으로 자각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이란 없다. 지능이란 성장과 정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정도의 문제다. 디지언트의 정신성은 덜 복잡한 기계의 정신뿐만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정신과도 연 •속적으로 존재한다. 아마도 디지언트는 튜링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언트에게 그런 시험을 시킬 이유는 없 다. 디지언트가 그런 시험 없이도 인간의 환경에서 잘 기능하기 때문이다. 디지언트의 지능은 깊기보다는 넓다. 그리고 그것은 고독에 기반하기보다는 사회성에 기반하고 있다. 디지언트는 인 간 존재자와 많은 방면에서 다르다. 하지만 디지언트는 데이터 어스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맥락 속에서, 좀 더 일반적으로는 인 터넷이라는 맥락 속에서 작동하고 심지어 번창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1장에서 논했던 경험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 는 중요한 구별이 있다. 데이비드 루이스는 메리 이야기에 응답 하면서 “경험이 최고의 스승”이라는 발상을 노골적으로 조롱한 다. 루이스는 어떤 특수한 경험을 겪은 뇌의 상태가 그 경험을 겪지 않은 뇌의 상태와 다른 한에 있어서, 뇌의 상태에 그런 변 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 예를 들어, "슈퍼 신 경외과 수술"이나 "마법"-그 특수한 경험을 실제로 겪는 것과 같 은 작용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상 뉴런을 다시 연결하거나, 뇌의 소프트웨어를 적절하게 다시 작성하는 것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루이스는 "경험이 어떠한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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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알아내는 것"이 실제로 “경험을 한 ”사례에만 국한될 필요 는 없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루이스의 논증은 인간 존재자 보다는 디지언트의 경우에 더 강하게 들어맞는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서 몇 줄을 변경하는 것이 시냅스 연결과 뉴런을 재 설계하는 것보다 더 명료하고 간단하다. 신경적 연결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물리적 뇌가 어떻게 경험적 정신과 연결되 어 있는지에 관해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나 디 지언트의 경우는 전적으로 소스코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기능으로 인해 주의를 흐트러뜨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에 대한 창의 암묵적인 정식화는 루이스의 접 근이 어디가 틀렸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만약 "경험은 알고리 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면,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단축할 방 법은 없으며 절차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방법도 없다. 경험 을 한다는 것이 정확히 뇌의 전기화학적 회로가 재설계되거나 디지언트의 소프트웨어 코드가 재작성되는 방식이다. 창의 소 설에서 디지언트의 코드는 쉽게 복사되거나 복제될 수 있다. 이 와 유사하게 (루이스의 사변처럼) 많은 과학소설 작품에서 뇌 상태나 정신 상태는 하나의 체화된 존재자에서 다른 존재자로, 또는 심지어 유기적 신체에서 분산된 컴퓨터 네트워크로 복사 되거나 전송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애초에 - 실제 로 경험을 가진-코드나 뇌 상태를 생성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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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빙성에서-혹은 심지어는 불가피하게 망상적인 본성에서 그 것의 순전한 비현존이라는 주장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주체적인 경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망상적일 수가 있는가?

나는 여기서 문제는 논의 전체의 기저에 깔린 철학적 가정 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니얼 스톨자와 유진 나가사와는 메리 이야기에 관한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모은 선집의 서문 에서 ”메리가 방에서 나올 때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것에는 모두 가 동의한다"(강조는 샤비로)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아 가서 "메리가 방에서 나오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단순 한 사실이 진부할 정도로 "자명한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 사한다. 메리의 실제 경험은 아무런 본질적인 중요성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철학자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히 려 다른 어떤 것이다. 잭슨은 메리가 새로운 경험의 결과로서 어떤 "정보"를 얻는지를 궁금해한다. 타이는 메리의 경험을 개 남이라는 이름 아래에 포섭하려고 한다. 데닛과 루이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메리의 경험을 전적으로 비실체적인 것으로 간 주한다. 그 경험이 "성향“의 입증에 지나지 않거나, 보조적인 능 력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모든 철학자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들이 메리의 경험을 그 자체로는 조금도 흥미롭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경험의 근거나 귀결,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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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로서 "정동, 색깔 등과 같은 사물의 비현존“을 수반한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응 중 하나는 단순한 격노다. 게일런 스트로슨이 데닛에 관해 말하듯이, 지각 대상 과 정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풍부한 현상학이나 경험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러한 현상학이나 경험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상적 경험은 나타나는 내용이 "현실적"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 내용 에 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참인지 아닌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한다." 현상적인 경험 자체가 '외양적으로 있는 것' 이다.

이 주장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최소화된 기초적인 형태이 다. 이 주장에 따르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망상적이라 할 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데카르트보다 엄격해지기를 바란다면, 데카르트 의 지나치게 지성적인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보다 원초적 인센티오("나는 느낀다")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라 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모든 나는 생각한다는 이미 "더욱더 깊은 수준에서 나는 느낀다를 전제한다"고 시사한다. 그리고 더 나아 가 "현재"로서 고립될 수 있는 시간의 순간에 존재하는 안정적 이고 실체적인 "나"에 느낌을 배정하는 것도 정당하게 의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식의 환원이 이루어지더라도 최소한의 어떠함은 남는다. 루이스, 데닛, 그리고 베커는 주체적인 경험의






도 불구하고 신비가 남는다.

단순히 우리와 다른 경험에 호소하는 대신에, 잭슨은 질적 인 경험 자체를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잭슨 의 이야기는 내가 나의 내적 감각을 갖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를 기술하는 것에도 아주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시사 한다. 감각질은 명백하게 객관화시키는 용어로 포착할 수 없으 며, 사전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어려움이 데닛과 루이스 로 하여금 "어떠한 것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으 로 치닫게 한다.

적어도 내가 잭슨의 주장을 사변적으로 재구성해볼 때 그 렇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잭슨 자신은 이러한 접근법을 추진하 지 않는다. 잭슨은 내가 원했던 방식으로 사변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앞서 본 대로 잭슨이 자신의 질문을 "물리적 정보"라는 관 점에서 서술하기 때문이다. 잭슨은 이런 종류의 정보-물리주 의자들이 완전하다고 믿는 것-가 “있어야 할 모든 정보는 아니 라고 단언한다. 잭슨에게 질적인 경험은 물리적인 것과는 다른 부류의 정보가 된다."(그러한 )경험, 그것의 특성에 관해서 우리 가 무지한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 잭슨은 정보 자체의 그 모호한 개념성에 대해서는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잭슨은 특정 유 형의 정보를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혹은 경험이 정말 로, 일정한 ”특성들“을 가진 실체로 기술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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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다. 그 결과로 잭슨의 논증은 감각적 경험을 겪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최초의 유혹적인 약속으로 부터 우리를 점점 멀어지게 한다. 대신 잭슨은 전혀 다른 무언 가를 생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물리주의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장에 관해서, 경험의 추정된 “특성들”이 언제나 "물리적인“ 것 인지에 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빨강을 지각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경탄하는 대신에, 우리는 루이스가 말하는 것처 럼 빨강을 경험하기 위해 "어떠한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강조는 샤비로)의 기준을 고려하게 된다. 질문은 정동적인 영역에서 인 지적인 영역으로 옮겨진다.

그러므로 이야기 자체가 기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을 향하 고 있다. 물리주의에 관한 모든 질문-잭슨과 그의 모든 응답자 에게 핵심적인 이해관계 - 은 사실상 무관하며, 요점을 완전히 벗 어난 것이다. 잭슨조차도 감각질의 특별성을 주장하면서 그것 을 "물리적 정보의 지위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감각 질이 실제로 물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당히 정당하 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잭슨은 이미 "감각질이 뇌 속에서 일 어나는 일의 결과”인 점을 받아들인다. "감각질은 어떤 물리적 인 것도 초래하지 않지만, 물리적인 어떤 것에 의해 초래되었다." 설령 물리주의를 부정하려고 해도, 잭슨은 이미 감각질이 물리 적 과정의 부수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정(자신이 내놓은 초 기 논문의 제목 자체에 반영되어 있듯이)에 자신을 국한했다.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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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찰쓰씨 · 일상 UX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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