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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 잔인한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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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낙관 | 로런 벌랜트 - 교보문고

잔인한 낙관 | 우리는 왜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로부터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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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어떤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에 걸림돌이 될 때 바로 거기에 잔인한 낙관의 관계가 있다. 

 

서론, 현 시점에서 정동

욕망하는 어떤 대상이 오히려 더 나은 삶에 걸림돌이 될 때 바로 거기에 잔인한 낙관의 관계가 있다. 그 대상은 먹을 것일 수도 있고 사랑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좋은 삶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기획일 수도 있다. 그것은 좀 더 단순한 어떤 바탕 위에 있을 수도 있다. 한층 나 은 존재 방식을 이끌어 내주겠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습관처럼 말이다.
이런 부류의 낙관적 관계가 본래부터 잔인한 것은 아니다. 낙관적 관계 가 잔인해지는 건 애착의 대상이 애당초 그 애착을 형성하게 만든 목표 달성에 적극적으로 방해가 되는 경우이다.
모든 애착심은 낙관적이다. 우리가 낙관주의를, 어떤 사람이나 생활 방식, 대상, 기획, 관념 혹은 장면 등의 여파에서 느껴지는 어떤 대상, 우 리에게 만족감을 주지만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어떤 대상 에 더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세계로 진입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기술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낙관이 낙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있다. 낙관은 야심찬 것이기에, 언제든지 무감정은 비롯해 온갖 감 정을 유발할 수 있다. 즉, 두려움, 근심, 배고품, 호기심에서부터, 중립적인 태도로 (슈퍼마켓의) 매장 통로들을 훑어보는 기민함, 다가을 변화의 전망에 대한 흥분감에 이르기까지 감정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혹은 다가오지 않을 변화에 대한 흥분감일 수도 있다.

낙관이 주는 일상적인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관습성을 유발하는 것이다. 관습성이란, 사람이나 세상이 만들어 낸 좋은 삶의 여러 장르 속에서 예상할 수 있는 안락함으로 욕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이다. 하지만 낙관이 목표를 드러낸다고 해서 어리석거나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 고통의 순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애착심은 종종 합리적 계산을 뛰어넘는 지적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낙관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떻든 간에, 낙관적 애착의 정동 구조는 특정한 환상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려는 지속적 경향을 포함한 다. 그 환상이란 이번에야말로 이 대상에 다가가면 나 자신이나 세상이 딱 알맞게 달라지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할 수 있게 하는 환상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나 민족이 폭넓은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분 투를 감행하는데, 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불을 붙였던 대상/장면이 그런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그때 낙관은 잔인한 것이 된다. 그리고 어떤 관계 속에 머무르는 즐거움 자체가 관계의 내용과 상관없이 지속적인 것이 될 때, 그래서 심히 위협적인 동시에 매우 확신을 주는 상황에 사람이나 세계가 스스로 매여 있음을 발견할 때, 낙관은 이중으로 잔인해진다.

관습성을 비롯한 여러 개념들을 일종의 '장소'(place) 혹은 '장면'(scene)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런 개념 자체가 육화된 삶이 전개되는 실천 및 의미의 영역이 라고 생각하는 벌랜트 특유의 사유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계층 상승과 낭만적 사랑의 대상이나 장면에서부터 정치적 인 것 자체에 대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잔인한 낙관의 여러 관계들을 살 펴본다. 하지만 이 기획의 중심에는 "좋은 삶"이라고 하는, 도덕적이고-친밀하고-경제적인 무언가가 있다. 사람들은 왜 좋은 삶이라는 관습적 환상 -가령 커플이나 가족, 정치체제, 제도, 시장, 그리고 직장에서의 지속적인 호혜 관계- 에 매달리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 불안정하고 취 약하고 커다란 대가를 요하는 것이라는 증거가 넘쳐 나는데 말이다.

환상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과 세상이 "결국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상적인 이론과 밑그림을 쟁여두는 수단이다". 그런 환상들이 마모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우울증이나 분열, 실용주의, 냉소주의, 낙관주의, 행동주의로 이어질까? 아니면 밑도 끝도 없는 엉망진창이 될까?
국가적 감상성에 대한 나의 삼부작 -『국가적 환상의 해부학』, 「여자의 불평』, 「미국의 여왕이 워싱턴 시에 가다』 -을 읽은 독자라면 이런 질문들이 내가 지난 두 세기 동안의 미국의 미학, 성애론, 정치학에 서 고찰하는 중심적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책들은 친밀한 공중들이 규범적 양태의 사랑 및 법에 근접한 상태에서 어떻게 작 동하는지에 특히 초점을 두면서 시민권과 공론장의 정동적 구성 요소를 살핀다. 이 책 「잔인한 낙관』은 이런 작업의 관심사를 초국가적으로, 시간적으로 확장해 우리 시대의 순간으로 연결한다. 이 기획의 아카이브 는 현재의 유럽과 미국을 포괄하면서 위태로운 몸 주체성과 환상을 시민권, 인종, 노동, 계급적 (탈)위치, 섹슈얼리티, 건강의 관점에서 살펴 본다. 이런 사례들은 지난 30년 동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 서사회민주주의의 약속이 철회되었다는 맥락 안에서 서로 연관돼 있다.

『잔인한 낙관』 이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기간 전체를 다 다루지는 않는다. 전후에는 누구나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민주주의 적 가능성을 믿었지만, 전후의 그 대단한 낙관에 동력이 되었던 경제적 기회, 사회적 규범, 사법적 권리는 이제 불균등하게 확장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상황에 국가가 개입을 회피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폭로하는 책은 아니다.! 대신에 이 책은 1990년 이후 최근까지 나온 대중매체, 문 학,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를 다룰 것이고, 구조 변화를 바라는 낙관의 판타즘적® 요소가 세계를 견인해 가는 힘이 줄어듦에 따라 뒤늦게 생겨 난 역사의 감각중추sensorium를 밝혀내고자 한다. 여러 환상들이 마모되 고 있지만, 특히 계층 상승, 직업 안정성, 정치적•사회적 평등, 생동감 있고 오래 지속되는 친밀함 등에 대한 환상이 그러하다. 무너지고 있는 일련의 확신 가운데는 능력주의에 대한 확신도 포함된다. 즉, 자유주의


-자본주의사회가 개인에게 공평한 호혜성의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일 관되게 제공해, 삶이 차근차근 쌓여 뭔가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쾌락을 보 호하는 대비책을 구축하는 기획이 될 수 있으리라는 느낌 역시 와해되는 것이다.

판타즘(fantasm)은 정신과 심리 작용으로 생성되고 또 심리 활동의 재료가 되 는 특정한 환상(비현실적 이미지)이라는 뜻으로 정신분석학이나 철학의 전통 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론적 정의를 명시하는 예를 찾기 어렵지만, 프로이 트, 라캉, 들뢰즈, 지젝 등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환상이 만들어 낸 장면으로, 특히 일정한 방식으로 패턴화되는 심적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맥락에 따라 판타즘 혹은 환상으로 유연 하게 번역했다.




이 책은, 일상이 삶의 구축과 기대감에 들이닥친 임박한 압 도적 위기로 가득한 쓰레기 매립지처럼 되어 버릴 때 과연 좋은 삶에 대 한 환상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살펴본다. 이 위기는 그 규모만으로 도 "삶을 소유"한다는 것이 여태 가졌던 의미를 너무나 위협하기 때문 에, 거기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성취로 보일 정도다. 또 이 책 은 위태로운 공론장의 출현, 친밀한 공중소※의 출현을 추적한다. 친밀한 공중은 경제적이고 친밀한 우연성의 시나리오를 공유하면서 어떻게 하 면 그런대로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패러다임을 주고받는 주 체들로 이루어진다.? 이 책의 각 장은, 한때 좋은 삶이라는 환상이 자리 잡을 공간을 열어 두었던 낙관의 대상/시나리오의 소멸에 관한 이야기 이며, 토대를 이루는 것 같았던 관계들이 이른바 "잔인한" 낙관의 관계 로 변해 버린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해 왔는지 그 드라마를 따라가 본다.


하지만 심미적으로 매개된 정동적 반응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역 사적 감각을 예시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 은, 이 책이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일반적 개념상의 전환을 도모한다는 것을 개략적으로 보여 준다
「잔인한 낙관』 이 가장 관심을 갖는 역사적 감각은 우리 시대의 순간 을 그 순간의 내부에서부터 이해하는 것과 상관이 있다. 이 책의 중요한 주장 하나는, 현재에 대한 지각이 우선 정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 현재 present는, 조율된 집단적 사건 또는 우리가 회상할 수 있는 어떤 한 시대 같은 다른 무언가가 되기 전에 우리에게 나타나는present 것이다
(2장 『직관주의자들』은 "정동적 현재"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비평 이론이 사유 하는 이런 방식을 기술한다). 애초에 현재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매개된 정동이라면, 그것은 또한 감각되면서 계속 수정되는 것이고, 시간의 장 르이기도 하다. 그 장르의 관습은 연장된 '지금'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과 사건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걸러 냄으로써 생겨난다.3
'지금'을 한정하는 조건들("현재"란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은 언제 나 논쟁거리가 된다.






212
분산된 인과관계에서 중단적 행위 주체성으로

이 분석에서는 행위 주체성과 인과관계를 개인적:제도적 승위에 어져 있는 환경적 기제라고 사유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엔데믹으로서 과체중의 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여러 환경의 중층 결정을 보여 주었 다. 하지만 - 생산 분야에서 고속화와 공공 분야에서 민영화, 재원 고 갈, 구획화라는 맥락에서 - 직장과 학교에서 주입된 아비투스가 비만 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병든 의지라는 유행병이 미국 노동인구의 생산성과 수명을 옥죄고 있다는 주장만으로 는 충분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와해되고 있는 이 회로의 다른 쪽 끝 에는 의료화의 대상이 된 주체의 행위 주체성이 있다. 이 주체에게는 설 교를 하거나 수치를 느끼도록 강요할 수 있고, 다이어트를 하라거나 가 족에게 다이어트를 시키라거나 집에서 밥을 먹으라거나 운동을 하라는 훈계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이런 훈계에 귀를 기울이지 않 는다. 역학 연구자들의 말로는, 더 기저의 이유가 사회경제적 차원에 있 다고 한다. 더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또 다른 방식으로 수치심을 강 요하고 심지어 반쯤 범죄자 취급을 하는 식으로 다이어트에 대해 설교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도권의 전문가가 규범적인 엄마: 대통 령 부인일 때조차 그렇다. 전문 지식은 너무나 흔히 수치심을 유발하는 식으로 사용되어 왔기에 피지배 인구 집단의 사회적 부정성을 확인해 주고, 그래서 도움이 되는 조언마저도 마땅히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 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건강한 체중 확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적• 정치적으로 설명 가능한, 순용에 저항하는 결정이라는 이미지보다 더 많은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현상을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서는, 생명정치적 사건으로 간주되 는 비만의 이미지를 현상학적 행위로서의 먹기와 분리하고 또 자양분이 자 표현의 공간으로서의 음식과도 분리할 필요가 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비만 문제의 어려움 때문에 학자들은 먹는 것을 스트레스로 인한 행동, 자기 투약의 욕망, 쾌락, 문화적 규범 등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학자들은 먹는 행위가 주권적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모두 위 반하는 행동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생각하지 못했다.이 여기서 나의 초점은 먹는 행위를 자기 중단을 통한 일종의 자기 투약으 로 보는 데 있다. 마리아나 발베르데는 자기 투약이 의지의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약점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62 그것은 종종 가족 등 스트레 스를 주는 환경에 합당한 대응이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방식 혹은 안락함에 대한 약속으로써 조직된 어떤 소속의 공간 안에 존 재하는 방식의 일부이기도 하다. 먹는 즐거움은 (만약 어떤 곳에 정기적으 로 가는 사람이라면)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만약 그냥 어딘가에 있을 뿐 인 사람이라면) 이름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장소에서 마음 편히 쉬는 것은 일시적이고 에피소드적인 일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세계 안에 존재하기를 즐겁게, 그리고 보통은 드라마틱하지 않게, 연장하는 일이다. 0 이런 관점에서 [음식물] 소비의 즐거움이 (식품 소비의) 지속 기간을 특징짓는다. 그것이 더딘 음식'ao tod의 또 다른 정의이 다. 더딘 음식은 자본주의적 활동이 환경을 파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는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하고 그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잘 살기, 그저 살아만 가기, [우리의 삶을 소진시키는 매락을 만들어 내 는 속도에 대항하는 방법을 일상의 비효율적 실천에서 발견하는 개념이 자 운동이다. 에 음식은 사람들이 통제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쾌락을 누릴 수 있는 몇몇 공간 가운데 하나다. 또 술이나 다른 약품과 달리 음 식은 존재에 필요한 것, 자아 돌보기와 삶의 재생산의 일부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소비자의 잘 살기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존재의 구조적 조건과 더불어 필요와 쾌락의 그 절박함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까? 내가 지 금까지 기술해 온 확산하는 쾌락의 형식은 자본화된 시간의 단축된 회 로 속에서 몸의 움직임을 원활히 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하는 행위 - 작업 의 고속화뿐만 아니라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이 하루, 한 주, 한 달을 겨우 겨우 넘기는 행위로 이루어지게 되는 맥락 - 안으로 포섭된다. 각종 청 구서를 해결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으로 조직되는 가까운 미래의 시간은 한 끼 식사가 가져다줄 수 있는 안녕의 느낌과 공존한다. 그리고 불건강에 대한 부모의 지식이 자신과 아이들에게 다른 식생활을 실천하 게 만들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지만, 노동계급 가정에 대한 문화기술 지 연구에 따르면, 가족의 지속에 대한 경제적 위협, 안녕에 관한 부모 의 느낌에 가해지는 경제적 위협은 가족 단위를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 고, 그런 가정 안에서 음식은 몇 안 되는 스트레스 해소책 가운데 하나이 며 부모 자식 사이의 분명한 연속성을 보여 주는 몇 안 되는 터전 중 하 나라고 한다. 더구나 경제적 궁핍의 장면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받

스트레스를 같이 받으며, 약간의 세대 차이가 생길지라도 부모가 위안 을 받는 방식에서 같이 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의존적 동일시를 유 지하는 복잡한 일이 먹는 일의 사회성을 통해서 단순화될 수 있고, 건강 은 아니더라도 행복의 장면을 일상적•반복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처해 있는 물질적 맥락이다. 우리가 우연성으로 이루어진 생존의 장면에 직면하는 동안, 노동하는 삶은 실 천적 주권성과 실천의 의지를 소진시킨다. 삶을 구축하는 바로 그 시간 에도 삶의 재생산이 주는 압박감은 사람을 소진시킬 수 있다. 먹는 일은 마모에 맞서도록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일종의 안정장치로 여겨질 수 있지만, 다른 사소한 쾌락처럼 자기 중단의 경험, 옆으로 흘러가는 경 험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항적-탕진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반드시 자기부정이나 자아 연장에 전념하는 행위일 필요도 없고 통상 그렇지도 않으므로, 전술적 의미에서나 유효 성의 측면에서 저항적 행위 주체성과 같은 말이 아니다. 오늘날 삶의 재 생산이라는 노동 가운데서 먹는 일은, 가장 좋게 본다면, 주체를 자기 유예 상태로 풀어놓는 행위이다.

이 “옆으로 흘러가는 "(Boating sideways) 경험은 일반적으로 규범화되는 행위 주체의 목적 지향적•직선적•단선적 움직임과 구분되는, 벌랜트의 ”측면적 행위 주체성"(lateral agency)을 가리킨다. 즉, 의지나 목적 지향성과는 상관없는 옆 걸음질, 엇나가기, 샛길로 빠지기 등 자기 방해 행위와도 같은 일종의 측면적 움 직임으로 기술되는 행위 주체성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벌랜트 가 제시하는 측면적 행위 주체성, "대항적 탕진 행위“(counter-dissipation) 개념과 연관해, 우리 사회의 젊은 층에서 비교적 최근 생겨난 신조어 "탕진잼" (거시적 목표나 장기적 계획과 상관없이 순간적 만족을 주는 행위에 탐닉하며 돈이나 시간을 실컷 쓰는 일)을 상상해 보자.


의식적 의지라는 개념을 비자발적 혹은 무의식적 행위라는 개념으 로 대체하자는 말이 아니다. 내가 여기 상술하는 모델에서, 문이나 삶은 일종의 기획일 뿐만 아니라, 에피소드가 발생함에 따라 개인성으로부터 살짝살짝 놓여나곤 하는 중간 휴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개인성을 재성 산하는 부담은 실천적 주권성이라는 괴로움, 믿을 만한 존재로 살아갈 지겨운 의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은 어 면 목적에 딱 들어맞는 일이 아니라, 의지 자체로부터 잠깐씩 휴가를 떠 나 다른 방식으로 행위 주체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의지는 준비 시간과 회복 시간을 포함하는 노동의 하루에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압박으로 인해 너무나 자주 소진되어 버리니 말이다. 이런 쾌락은, 의식, 의도성, 효과적인 의지를 가지라고 요청받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주체를 중단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단과 자기 연장은 물론 반대항이 아니며, 바 로 그것이 내가 말하려는 요점이다. 하지만 다른 요점은, 더딘 죽음의 장면 - 여기서는 정신과 신체의 건강이 실제로 상충하는 목표일 수 있 고 심지어 내적으로 상충하는 목표가 될 수도 있다 - 에서 일상성 속 확 산이나 변동의 다른 물결을 타는 행위는 삶을 소유한다는° 사실의 의미 에 대한 혼란을 드러낸다. 그것은 건강하다는 의미인가? 사랑한다는, 사랑받은 적이 있다는 의미인가? 주권적 존재임을 느꼈다는 의미인가?
목표로 삼았던 향락의 상태나 느낌에 도달한다는 의미인가?"삶을 소유 한다는 것'은 이제, 좋은 삶을 꿈꾼 후에 혹은 아예 꿈도 꾸지 않은 후에, 우리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인가? 믿을 만한 쾌락의 장면으 로서의 ''은 대체로 관성으로 나아가는 그런 경험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인가? 관성으로 나아간다는 그 표현이 압시하는 모든 것, 즉 오 락가락하고 산만하고 감각적인, 쾌락과 무감각 사이의 공간에서?
여기서 내 초점은 자본의 주체가 겪는 마모가 생존을 더딘 죽음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무감각을 비롯하여 소외, 냉담, 분리, 주의 분산 등 여러 정치적 우울의 관계들은 더딘 죽음의 환경과 씨름하는 정동의 형 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종속된 인구 집단의 경우에 그러하다.
매 맞는 여성의 [대항] 폭력이 생존을 위한 파괴성으로 재인식되어야 했 던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하는 내용은 약간 다르 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삶의 재생산을 향한 행위는, 삶이나 자아를 더 낫게 만드는 것과 동일하지도 않고, 잘 살기에 집단적으로 실패하는 구 조적 조건을 따르며 살아가는 모방적 대응도 아니며, 책임감 있는 존재 로 사는 일로부터 그저 짧은 휴가를 갖는 일도 아니다 - 그런 행위 역시 덜-나쁜 경험을 만들어 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잠시 한숨 돌 리기, 유예이지만, 회복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행위가 모두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 먹는 일은 수많은 종류의 자기 이해를 연루하며, 특히 쾌 락의 선택이 너무나 흔히 제시하는 도덕적 거울을 중심으로 수치심과 자의식을 유발하는 문화에서 그렇다 - 하지만 그런 행위들은, 예를 들 자면, 종종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장기적인 구상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압도당한 삶의 구조적 위상은 의식과 환상의 이런 단축을 심화한다.
위기 일상성 체제하에서 삶은 밑동이 잘려 나간 것처럼 느껴지고, 수평 선으로 나아가는 당당한 수영이라기보다는 필사적으로 철벅거리는 개헤엄처럼 느껴진다. 먹는 일은 결국 뭔가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어쩌 면 좋은 삶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보통은 한순간 동안 퍼져 나가는 안녕 의 느낌이고 미래를 향한 투사는 아니다. 물론, 역설적으로, 적어도 자본 의 이 국면에서, 미래에 대한 지향이 없이 먹을 때 미래는 더 작아진다.


맺음말 : 잔인하고 일상적인 자양분

더딘 죽음이 일차적으로 헨리 소로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성이라고 보았던 조용한 절망의 삶을 멋지게 설명한 주해로
※인 것은 아니다. 비록 영혼 축이기라는 표현이 부르주아 사회성이 초 래하는 마멸을 기술하기 위해 너무나 자주 사용되었고, 그래서 주권성 이라는 신기루에 근접한 채로 살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은 것을 희생한 다는 데 대해서 우리가 할 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 [내가 논 의한] 더딘 죽음은 노동이라는 희생적 폭력과 점점 증가하는 소비문화 의 과잉 자극 유혹에 자본주의적 주체가 이중으로 처형당한다는 의미에 서 보드리야르가 사용하는 "더딘 죽음"의 멜로드라마적 어법과도 다르 다. 더딘 죽음이라는 표현은 또한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 살아가기 자체를 이야기하는 실존적 방식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처럼 아닌 예들 을 열거하는 것이 우리의 특정한 생명정치적 국면을 형성하는 더딘 죽 음의 공간에 대한 중요한 무언가를 시사한다. 주 논점은 사람들이 그 공 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저 아주 잘 살지 못할 뿐이다.
지구화, 법, 국가적 규제의 복잡한 과정 속에서 일상이 전개되는 배 경으로서 이런 삶의 마멸 또는 죽음의 속도는 보통 노동자에겐 새로운 시대에 벌어지는 낡은 이야기가 분명하다.8 마찬가지로 세계는 다양한 무정부주의, 협동조합, 반자본주의, 급진적 반노동의 실험 속에서 착취 에 대항하는 행위로 계속 고동친다. 사람들은, 가장 무해하고 충동적인 일상적 쾌락의 토대까지도 포화시키면서 몸을 소진시키는, 이 이윤 짜 내기라는 흡혈 행각의 유지 관리를 거부하기 위해서 - 삶의 재생산이 라는 급선무 때문에 - 그들에게 부족한 시간을 점점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69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현재 속의 잠재성은 원 기 충천하게 하는 지속 가능한 삶의 이미지로 상징화되거나 신체적 장 수와 사회 보장이라는 멋들어진 약속으로 보장되기보다는, 소진된 실천 적 주권성과 빗나가는 주체성의 레짐 안에서, 때로는 섹스, 멍한 상태로 있기, 생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음식® 같은 에피소드적 휴식에 빠져 드는 대항적-몰입counterabsorption으로 표출된다.

"생각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음식"(food that is not for thought)이라는 말은 "생각할 거리: 사유의 소재를 의미하는 'food for thought"라는 관용적 표현을 비틀어, 먹는 행위를 생각하는 삶으로부터의 탈출로 보는 시각을 드러내는 표 현이다.
친절한 찰쓰씨
글쓴이
친절한 찰쓰씨
친절한 찰쓰씨 · 일상 UX 디자이너
기획·디자인·단상을 조용히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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