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얼마전 한번 더 부모를 상실했다.
늘 다짐하지만, 늘 실패하지만, 이런 속상함과 애림은.. 늘 나혼자만의 망상일 뿐이었음을 알기에..이번엔 꼭 나또한 잘라내리라 한번더 다짐을 해본다.
차라리 어려서부터 없었으면 모를까
차라리 예전처럼 찢어지게 가난했으면 모를까
1000만원 보증금 월세80, 관리비20 +생활비 의 재산에
6500만원 연봉을 받는 만 사십세 나는 이젠 기초수급 대상자이다.
누군가 재산과 능력은 다르다고 했던가.. 적지않은 연봉이라 생각하지만 대기업 직원들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한? 주변 인들보다 연봉을 조금 더 받았는 것 같지만, 객지생활은 역시 녹녹치가 않다. 밑빠진 독이라 그런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월세 살이이다.
부모는 아파트가 두 채있다. 작은 집 하나는 나보고 결혼하면 살라고 했었는데 어느날 두 곳을 정리하고 14억 정도의 빌라를 계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다 빚이라며 살기 쉽지않다며 죽는 소리를 한다.
이렇게 빨리 사전 조사없이, 14억 빌라를 마치 쿠팡 주문하듯 급히 서두를 까닭은.. 얼마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하면서.. 월세 살이하느라 10년째 제자리 걸음이라 조심스레 속마음을 털어두었것이 아마 도화선이 된 것 같다.
일년 정도전, 부모님은 주말마다 전국 각지로 캠핑을 다닌다고 고백하셨다. 48평 집에 오랫만에 방문했는데 집안에 안마의자부터 캠핑용 대형 스토브 등 고가의 장비들이 널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집이 작아보인다는 농담을 했더니, 캠핑 생활 2년차에 처음으로 아들에게 캠핑을 다닌다는 말씀을 털어 놓으셨다. 웃픈건 그리고 바로 스토브를 접어서 창고로 옮기셨다.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젊을때 고생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신다. 스토브는 언젠가는 난로가 있긴 한데 춥다며 집에 있는 전기장판을 가지고 나가기 위해 이동형 배터리를 추가로 하나 더 구매한다며 찾아봤는데 80만원이면 살 수 있다며 내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한다. 조금 전에, 아들이 재취업 중인데 중간에 다행히도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되서 얼마 전에 그 지원금 50만원을 받아서 그 돈으로 짬내서 오랫만에 내려왔다고 하자.. 자기도 요즘 힘들다며 나온 얘기가 캠핑 장비 구매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해명같은 모습이 뭔가 드라마 같아서 기분이 참 먹먹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욕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담배만 피웠다고 들었다. 게다가 형편이 너무 가난해서 할머니는 어머니를 친적에 더부살이를 보내야만 했다고 들었다. 사실상 형제남매는 각자 흩어져 살았다. 다들 가난했다. 나이 차이가 많았던 이모가 사실상 어머니 역할을 했다고 했다.
부유한 형편에 다 갖는 아이와 가난한 형편에 다 갖는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각자의 생각과 태도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으리라.. 어머니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젊었을때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징그럽게 미워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보다 돈을 못버는 순간부터는 늘..'너 때문에 이 집안 꼴이..'하며 원망을 담은 목소리를 소리치곤 했다. 여느 집안처럼 매일같이 집안 싸움이 있었다. 일주 일에 한번은 뭔가가 던져지고 깨졌다.
어려서 부모님은 늘 집에 없었다. 어찌 나만 그랬으랴.. 아마도 내가 맞벌이 자녀 1세대 쯤되는 것 같다. 매일같이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돈벌이가 처음 자리를 잡았을 즈음 부터는 시장에서 순대국밥집 한 곳을 지정해서 그곳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때 문과였는지 이과였는지 모른다. 내가 수능을 면접 맞았는지도 어떤 과를 다녔는지도 모른다. 졸업을 언제 했는지 또는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다. 군대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훈련소도 혼자 갔고 면회도 없었다. 첫 취업을 어디로 했는지 얼마 받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당시의 난 아무런 상관없었다.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라고.. 가족이야말로 깐부 그 이상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가난이 죄라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즘, 아- 내가 너무 오만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죽어라고 일했던 것은 어릴때 부터 있던 가난에 대한 강박과 당시 본인보다 잘 살던 이들에게, 본인을 무시하던 이들에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은 갈증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난할땐 가난해서 신경을 못썼고
돈이 생기니까 뺏길까봐 신경을 끊고 있다.
처음엔 부정했다. 그러다 8년전 어느날, 내가 거주하던 집을 갑자기 내놓겠다던, 난 내려와서 살았으면 한다는 말을 듣고 내려와서 직장까지 다니고 있었는데.. 막상 이사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기에 그렇다고 어머니 집으로 들어오라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집을 팔고 집값이 더 오를 것 같은 아파트를 사야할 것 같다며 통보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4년전 작은 아파트에 거주 중이던 나는, 아파트 부실 공사로 인해 화장실 타일이 터지는 현장을 목격했다. 임시 방편으로 테이프로 벽을 막아두었는데.. 그로무터 1년이 넘도록 방치했던 벽을 내가 집을 비우자 마자 월60? 70?세입자를 위해 바로 수선을 해주셨다. 금액은 50만원.. 여느때처럼 수입은 말을 흐렸고 지출은 또렸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자상하지 못했다. 칠형제 중 결혼을 아직 못하고나 가출을 했던 삼촌이 있었지만 안중에 없었다. 돌아가실때 재산을 한 사찰에 기부했다. 그리고 사찰 소유로 바뀌게 될 땅에 묻히셨다. 돌아가시고 염할때 옆에서 사찰에서 오신 분께서는 할아버지가 극락왕생을 하실 것이라 말하는 걸 들었던 적이 있다. 이에 일찌감치부터 세대가 바뀌면 입장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며 소유권 상속을 하지않고 사찰에 기부한 것에 대해 형제들은 하나같이 흥분했다. 참고로 기부한 것은 산 하나 정도?조금 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세종시로 편입되었다.
그렇다고 형제들의 우애도 그렇게 좋지도 않다. 할아버지 땅 상속을 얘기하다 친인척 가족 묘 얘기가 나오는데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있고 정작 가족이 없는 아직 결혼을 못해서 장례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붙들고 요즘얘들은 제사도 안지낸다며 하소연만 하고 있다. 삼촌이 정말 어렵게 돈을 모아서 가족 묘 얘기를 했지만 그 누구도 반응해주고나 거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다. 그러니 왜 여태 결혼도 못했냐는 애꿎은 타박만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할아버지는 암으로 거동이 불편하실때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옛날 주택 현관 위에 개조된 형태로 있던, 멀쩡한 사람조차 비좁고 가파크게 만들어진 계단으로만 갈 수 있던, 할아버지 요양하시기 전과 후로는 창고로 밖에 안쓰이던 곳에 계셨었다. 어린 나는 철없이 할아버지는 왜 여기 사세요?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칠 형제 중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모가 없이 자랐고
아버지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는 자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자녀의 기대를 말도 없이 져버렸고 이에 복수 아닌 복수를 했던 셋째 아들이다.
과거 캠핑장비 썰을 들었을 무렵, 아버지의 새 차를 타고 가는길에 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니, 당신 친구는 매정하기도 하지 본인이 그렇게 살만하면서 사위가 그럴게 못살면 조금이라도 도와줘야지 남들 앞에서 흉이나 보냐?!" 그러나 어머니는 내눈치를 살피며 눈치없는 아버지 옆구리를 찔렀다.
참고로 새 차를 사신 것도 반년이나 지나서 어쩔 수 없이? 마추쳐버려서 굳이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종종 맞고 사신다. 그렇게 가난한때는 매일같이 이혼한다며 서류에 도장까지 찍어가며 싸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대로인데 어느날 부터 이혼얘기가 나오지 않났다. 언젠가 물어봤다. 요즘은 이혼 얘기를 안하네? 그러자 점집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우린 정말 안맞는데, 서로 등 돌리고 서있는 형국이래. 그런데 그래서 등을 맞대고 서 있응 수가 있데.." 와.. 명언이었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느날 동생이 울면서 집에 왔다. 본인이 자살하고나 아버지를 죽이거나 할 것 같다며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느날 처럼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고 있었는데 어머니 비명소리가 들려서 안방문을 열었더니 아버지한데 오히려 뭔 참견이냐며 싸대기를 맞았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부모님은 58년 생으로 일찍 결혼하셔서 아직 젊은 편이시다. 그리고 당시 동생은 나이는 서른다섯살이다.
이때 동생이 왜 이렇게 맞으며 사냐고 서로 울면서 그 이유를 들었는데, 이혼하면 재산을 반으로 나눠야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순간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돈은
남편에게 맞으면서, 남편이 여기저기 빚을 내는 걸 감당하면서, 밤낮으로 정말 치열하게 일하면서,
자신 또한 부모없이 벌고 모은 그 돈은
본인이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맞으며 살아도 되는 이유였다.
서른 다섯의 딸이 싸대기를 맞으며 살아도 되는 이유였고
마흔 넘은 아들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갖지않을 이유가 될 수 있다.
부모없이 자란 어머니와
무관심한 부모에게 자란 아버지가
이십대때, 첫번째 실수는 낙태하고
두번째 실수마저 낙태할 수 나은 아들은
어려서는 아버지를 무관심하게 대하던 할아버지댁에 보내져 친구없이, 교육없이 지냈다
그땐 몰랐지만 먹기 힘들었던건 외로웠던건 부모곁이나 할아버지 곁이나 매한가지 였던것 같다
이방인,
태어나면서 변함없이 지속하고 있는 이 이방인 생활은
시간이 지나고 좀처럼 약이 되질 않는 것 같다.
맞다. 하소연이다.
부모없이 칠순넘어 살만해진 부모의 무관심에
마흔되도록 이방인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은
철없이 원망하고 있다.
명백하게, 원망하는 것이다.
인맥돈맥없는 내게 필요한 쏙 뽑아먹고 버리는
사회에서의 이방인 취급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가족까지 내게 그럴줄 몰랐다며
원망하는 것이 맞다.
주머니 돈이 쌈지돈이라며
배고파도 안고픈 척
남들이랑 비교 당해도 괜찮은 척
남들보다 없어도 무덤덤한척 했던
나의 애정이
맥없이 무너져버린 상황을 원망하고 있다.
부모의 쉼없는 노동은 결국 가족과 나를 보살피기 위한 희생이라 자위하며 나에 대한 무관심은 단지, 가난 때문이라고, 형편이 나아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 매몰찼던 노동이 가족이 아닌 단지 가난에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했던 발버둥 이었음을 수차례 목도하면서.. 그리고 처음으로 내 힘듦을 고백했던 이후, 모든 재산을 급하게 처분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록 그들에겐 얼마되지 않아보이는 미천한, 부모에 대한 동정과 애정 그리고 존경은 그저, 형언할 수 없는 상실과 원망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러던 중 생일.
마치, 거래처에 명절 안부 인사 묻는 보내는 카톡이 왔다.
'어떻게 받고 얼마나 쓸모있냐'보다 보다는 주는 행위, 벙사활동 인증샷 같은 택배가 도착했다. 32도가 넘는 더위에 아이스팩 두-세를 얇은 뾱뾱이 은박패키지에 담아.. 도착한 냄새 지독해진 고기가 담겨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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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날들이 모여 멀어져간 오늘..·마흔 넘어의 아침
